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만주 전략 공세 작전/작전 경과 (문단 편집) === 제39군의 진격 === 제6근위전차군과 함께 쐐기를 형성해야 할 제39군 사령관 류드니코프 상장 또한 계획을 세워 두고 있었다. 류드니코프는 재빠른 기습으로 상대할 일본 제107사단이 후퇴해 재집결할 기회를 주지 않고 작전 목표선까지 들이쳐 저지선을 형성할 생각이었다. 그는 또한 대싱안링 산맥에서의 적에 대해 피해 심한 정면공격을 회피할 생각이었다. 이 야심찬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39군은 제6근위전차군의 우익에서 하루당 5~6킬로미터의 행군속도를 유지해야 했다. 그래야만 솔룬에서 하일라얼까지 탄탄히 확보함으로서 제6근위전차군의 우측방을 방호할 수가 있었다. 제39군이 최종적으로 정한 계획은 2단계의 작전으로 7일 동안 전선군 사령부에서 떨어진 작전목표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첫번째 작전 동안 39군은 일본 방어군을 우회하여 대싱안링 산맥을 넘고 주공 병력은 Dzurkin Harul과 Boto Nela를 통해 Tiikhonera-Kakusupera 라인을 확보해야 했다. 첫 4일동안 1단계 작전이 수행되고, 2단계 작전으로로 솔룬과 하일라얼을 공격해 일본군을 분쇄하고 점령하는 일이 2~3일 할당되었다. 제39군의 작전 편성은 이 목적을 재빨리 달성하는 데 맞춰졌다. 39군은 3개 소총병군단의 제대로 되어 있었으며 주공 축선으로 제61 전차사단이 야전군의 기동군을 이끌게 되어 있었다. N.N. 올레셰프 [[중장]]의 제113소총군단과 I.S 베쥬글리 중장의 제5근위소총군단이 저차 사단을 따라서 4~5킬로미터의 공세 전면을 책임질 것이었다. 두 군단 모두 전차여단 1개씩을 선견대로 두고 있었다. 각 군단급 제대는 트럭에 탄 차량화소총병대대들과 1개 자주포대대, 1개 야포 대대, 1개 대전차대대, 그리고 2개 박격포 대대의 지원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61전차사단과 각 군단 직속 전차여단들, 그리고 2개 소총병사단이 제1제파로 들이치고 뒤따르는 소총병사단들이 제2제파로 후속할 것이었다. 하일라얼을 향한 2차 공세 축선은 I.I 포포프 [[소장(계급)|소장]]의 제94소총병군단이 제1제파로 들이칠 것이었고 제94소총병군단 소속 제124소총병사단이 야전군 예비대로 할룬-아샨 요새화 지대에 대한 공세를 지원할 것이었다. 전선군은 상당한 기갑과 화력 지원을 39군에게 지원하여 39군이 재빨리 일제히 화력을 퍼부어 일본의 국경 요새들을 가루로 만들 것을 약속했다. 39군은 지원받은 모든 기계화 전력들을 각 제파에 공급했다. 사실 39군은 기습적인 공세를 할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포병전력은 필요가 없었지만, 돌파 이후 가해질 주공 축선을 형성할 군단마다 1개 박격포 연대와 1개 포병사단이 지원되었다. 2,000문의 야포와 박격포가 주공 지역에 포화를 퍼부울 것이었다. 진격에서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된 것은 대규모 중장비들의 진격이 선견대의 진격과 보조를 맞추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포병의 진군이 철저하게 짜인 시간표를 통해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제12항공군 소속 1개 항공연대가 빠진 1개 항공사단이 39군의 공세를 지원할 것이었다. 작전 첫째날, 항공전력은 솔룬, 하일라얼 그리고 할룬-아샨의 요새화 지대와 일본 비행장들을 날려버릴 계획이었다. 각 군단마다 증강된 공병들이 대싱안링 산맥의 장애물 많은 험지에서의 진격로의 확보와 유지를 위해 지원되었다. 8월 2일, 말리놉스키가 39군 사령부를 시찰하고 류드니코프의 계획을 승인하고 39군에게 집결 지대로 움직이라고 명령했다. 그날 저녁, 야전군 병력들은 120~130킬로미터에 이르는 행군을 시작했다. 제113소총병군단은 2개 종대로 행군해 8월 4일 0600시에 Ara Bulagin Obo에 도착했고 제5근위소총병군단은 3개 종대로 행군해 8월 5일 0600시에 집결 지역에 도착했다. 제94소총병군단(제124소총병사단이 빠진)은 Herempte Nur에 8월 3일 0600시에 집결했다. 제124소총병사단은 8월 5일에 집결지역에 합류했다. 8월 6일에는 39군 전체가 그날 밤까지 집결지역에 합류, 긴 행군의 휴식을 취했다. 8월 8일, 제39군은 행군 강도에 비해서는 짧은 휴식을 끝내고 모든 공격 태세를 마쳤다. 39군은 작전 암호 '몰니아'(번갯불)가 발동되고 자바이칼 전선군 참모장 M.V 자하로프 대장은 39군에 공세 시간을 제대로 맞춰야 한다고 주문했다. 수색 병력들과 선견대의 소총 사단들이 진격로를 확보한 후 공세를 원할하게 할 교통정리를 8월 9일 0005시까지 마쳤다. 주력 병력은국경지대에서의 공세를 0430시에 실시하고 항공 전력들은 0530시에 출격할 것이었다. 다른 야전군들과는 달리, 39군의 공세 지역의 하늘은 맑았고 공세 또한 완벽하게 진행됐다. 작전 개시 시간, 항공지원과 화력지원 없이, 제39군은 소만 국경을 넘었다. 야전군 선견대인 제61전차사단과 군단 선견대들이 본대에서 20~30킬로미터 앞서서 진격하고 1제대의 소총병군단 소속 사단의 선견대와 정찰대들도 본대와 15킬로미터 정도 앞서서 진격했다. 국경을 넘는데 성공하자 대대적인 포격이 진격종대 앞에서 작렬하며 화망을 형성했다. 좋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울퉁불퉁한 도로 상황과 너무 화창한 날씨가 39군의 진격 속도를 조절하게 만들었다. 거친 길은 타이어와 무한궤도의 운행을 방해했고, 후방 보급부대들은 선견대에 비해 지나치게 뒤쳐졌다. 게다가 8월의 뜨거운 기온이 연료 소모를 더 심하게 만들었다. 소련군 군의관들은 갑자기 바쁘게 움직여야 했는데 아무리 39군이 사막에서 적응 훈련을 했다고는 하지만 8월 한여름의 화창한 날에서 햇볓을 그대로 내리쬐느라 지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각 사단마다 30~40명 씩은 일사병 증세를 호소했고 보급된 물은 열을 내리기에는 너무 부족했다. 결국 30~40퍼센트의 장병들이 수통의 물을 다 비워버렸다. 이런 악재에도 불구하고, 113소총병군단과 5근위소총병군단은 공세 첫날이 저물 때 대싱안링 산맥에 도달했다. 일본군의 저항은 미미했다. 하루 동안 더 진군하니 대싱안링 산맥은 병사들의 뒤에 있게 되었고 일본의 국경 요새 지대들은 죄다 우회당해 버렸다. 39군의 본대가 대싱안링 산맥을 넘느라 고생할 동안, 제94소총병군단은 만주 북동쪽에서 진군을 시작했고 1939년에 [[할힌골 전투]]가 열렸던 역사적인 장소를 지나갔다. 221소총병사단과 358소총병사단은 진격하면서 40킬로미터가 넘는 진격로를 확보하며 흩어져 있던 일본군 기관총 진지들과 만주국군 기병들의 산발적인 공격을 처리하며 하일라얼에서 남서쪽으로 100킬로미터 떨어져 있던 후이 골에 도착했다. 94소총병군단이 하일라얼을 향해 진군할 때 124소총병사단은 일제히 할힌골 남쪽에서 포진해 할룬-아샨 국경 요새지대에서 뛰어나올 일본군의 공격을 경계했다. 일본군 제44군에게 공세가 가해진 8월 9일 0200시에 일본군 제3방면군 사령부는 하일라얼과 왕예먀오를 비롯한 주요 거점들에 소련군의 폭격이 쏟아지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제44군은 0300시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전시 방어 계획을 가동시켰다. 0500시에 제107사단 참모장이 전화를 통해 소련군의 공세에 사단이 궁지에 몰렸다고 보고했다. >"아샨 요새 지대로 전차를 동반한 적의 소총 사단의 공세가 시작되었고 시간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셀 수 없을 정도의 적 전차들이 국경을 넘어서 Sankuoshan의 남쪽으로 파고들어서 사단의 배후를 들이치고 있다. 적 무선 통신을 감청했는데 우리 사단에 대한 적들의 공격 계획이 완성되어 간다 한다. 사단은 소련군에게 진짜로 공격받고 있고 소련군은 이곳에서 우리 사단을 분쇄할지도 모른다!" 일본 제107사단에게 닥친 치명적인 문제는 이 다양한 축선에서 들어오는 막대한 위협을 어떻게 막아내느냐는 것이었다. 일본 제44군은 근처의 117사단과 63사단에게 107사단을 지원하라고 명령했지만, 107사단을 조여오는 공세를 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다음날, 제3방면군 사령부는 제44군에게 107사단으로 쏟아지는 적 공세를 다시 판단하고 Paichengtzu-Arshaan 라인과 Hsinganling 터널을 비롯한 적의 진군을 도와줄 만할 모든 교통 시설들을 파괴하고 장춘 근처로 사단을 후퇴시켜 제30군 경계 지역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했다. 8월 10일의 늦은 시각, 소련군은 107사단과 44군의 통신망을 차단해 107사단이 상위 제대로부터 명령을 받을 수 없게 만들었다. 궁지에 몰린 107사단은 일본군 답게 최후까지 저항하며 솔룬과 왕예마오로 가는 철도선을 내주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대항했지만 작전 종료까지 소련군을 좀 짜증나게 만드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8월 10일에서 12일까지 소련군은 고생하며 우차커우 남쪽의 대싱안링 산맥을 넘었고 일본군의 소규모 병력이지만 그 지역에서 중요한 군사적 거점을 점령한 일본군과 맞닥트렸다. 다행히도 전날만 해도 최고기온이 섭씨 35도까지 치솟았던 무더위는 난데없이 만주의 변덕스러운 기온 변화 덕분에 19도에서 22도로 급락했다. 소련군은 다양한 지형의 계곡을 지나쳤지만 땅이 말라있어서 진격에 영향을 주진 않았다. 문제는 이 계곡 지대를 건너자 공병 지원 없이는 지날 수 없는 뻘흙 지대가 펼쳐졌다. 소련군 공병들은 고생고생 하며 진격로를 열고 유지했다. 강들 또한 전술적 장애물이 되었다. 산맥 서쪽의 Sel'zhin Gol 과Siaburutan Gol 강은 장마철이 오며 불어났고 주변을 뻘밭으로 만들었다. 소련군 공병들은 이 강들에 6개의 가교를 부설했다. 대싱안링 산맥을 넘는 것은 연료 소비를 극심하게 만들었다. 뜨거운 태양이 엔진을 가열했고, 험한 길이 엔진을 혹사시킴으로서 모든 차량들과 전차들이 할당량의 50퍼센트가 넘는 연료를 사용했다. 류드니코프는 어떻게든 우회로를 찾으려 했지만 지도가 워낙 부정확해 어떻게 상황을 딱히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L.G 바사네프 소장의 제192소총 사단은 이 바위투성이 산맥을 2달 동안 넘어야 했다. 이런 어려운 문제에도 불구하고, 5근위소총병사단과 13소총병군단은 61전차사단을 선봉으로 세워 8월 12일에 일본군의 옆구리를 파고드는데 성공했다. 솔룬과 왕예마오로 가는 진격로가 열렸고, 일본군은 소련군을 조금 성가시게 할 정도의 저항밖에 하지 못했다. 이미 우회당해 버린 제107사단은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다. 제39군 부사령관 G.K 코즐로프 중장은 제94소총병군단에게 소규모 일본군 초소들을 쓸어버리고 하일라얼로 진격할 것을 명령했다. 8월 11일 저녁에 야전군 선견대가 하일라얼 남쪽에서 들이칠 동안 군단의 주력이 Dunda-Khana에서 12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Bualuto로 진격했다. 그런데 하일라얼이 소련 제36군에게 우회당하여 제94소총병군단은 더 이상 하일라얼에 붙잡혀 있을 필요가 없게 되자 제94군단은 새 목표를 갱신했다. 군단 소속인 V.N. 쿠쉬나렌코 소장의 제221소총병사단은 대싱안링 산맥 동쪽의 부차적인 일본군 저항 거점들을 쓸어버리면서 태흐르쑤 강과 태흐르치 강의 계곡을 통해 루순 트시히로 가는 길인 Tagan-Dabe를 장악했다. 제358소총병사단은 남쪽으로 진군해 할룽 아산 요새지대를 공략하는 제124소총병사단과 합류해 요새지대를 진압하게 되었다. 제39군 병력들이 일본군을 요새 지대에서 끌어내는 동안, 제124소총병사단은 8월 10일에 요새 지대로 직접 치고들어가 8월 10일에 일본군 제90연대를 박살냈다. 그날 아침에 D.M. 렐레코프 대령의 제622소총병연대가 할힌골을 넘어서 할흐 강 북쪽의 일본군 전초부대를 괴멸시켰다. 8월 10일과 11일 동안 124소총병사단은 요새 지대 깊숙히 뚫고 들어갔고 일본군 요새들과 초소들을 체계적으로 제거해 나갔다. 잠깐 북쪽으로 진군로를 돌려 사단은 이얼수와 아샨에 12일날 도착했다. 그날 저녁에 일본군은 아샨의 남동쪽과 북동쪽에서 역습을 가해 왔지만 124소총병사단은 이 역습을 간단히 막아내고 되려 일본군을 우챠오커우로 몰아냈다. 일본군 제107사단이 지키던 요새 지대의 대부분의 중요 장소들은 전부 124소총병사단에게 넘어왔고 124사단이 뚫어놓은 진군로를 따라 제5근위소총병군단이 솔룬 남서쪽으로 들이치기 시작했다. 8월 12일에 제5근위소총병군단과 제113소총병군단은 울란 호 북쪽에서 동쪽을 향한 진격을 완수하고 솔룬과 테포씨 남서쪽의 구릉지대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제5근위소총병군단의 선견대가 하일라얼로 향하는 철도망을 장악하고 일본군 1개 대대 병력을 태우고 솔룬으로 향하던 일본군 열차를 우연히 만나 신나게 때려부셨다. 솔룬으로 가는 길이 열리자 예상하지 못한 지형상의 난점이 군단을 솔룬에서 재집결하는 것을 방해했다. 울란 호와 다른 강들의 계곡들이 솔룬으로 가는 길과 철도 라인을 막고 있던 것이다. 소련군 차량들은 강 주변의 늪지에서 벗어나느라 안간힘을 써야 했다. 이 상황은 소련군 병력들을 울란 호 일대에 흩어지게 만들었다. 소련군 공병들이 죽을힘을 다하고 다른 병과 병력들이 공병들을 도와서 길을 개척해서야 이 난감한 상황이 그나마 해결될 수가 있었다. 이 정체 상황은 소련군 병력들이 10킬로미터나 되는 지대에 늘어지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단 선견대들은 하루에 40~80킬로미터를 넘게 진군하는데 성공했다. 8월 12일 오후 제5근위소총병군단은 솔룬 남서쪽에서 집결하고 군단 선견대인 제44전차여단과 제19소총병사단, 제17소총병사단을 앞세우며 솔룬 시로 돌입했다. 제44전차여단과 제17소총병사단이 솔룬 시가지에서 일본군을 정리할 동안 제19소총병사단은 솔룬 남서쪽의 철도망을 장악했다. 그날 저녁, 대대적인 항공지원과 포격지원이 솔룬에 떨어진 이후에 제5근위소총병군단 병력들은 도시의 심장부를 장악했다. 도시를 지키던 일본군 제107사단 소속 제178연대와 제2만주국군 기병사단은 도시 북서쪽을 통해 퇴각하면서 소련군을 향해 계속해서 반격을 시도했지만 별 성과를 얻지 못한 채 격퇴당해야 했다. 소련군은 솔룬 남쪽으로 이동해 테포씨로 향하는 철도를 장악했다. 같은 날, 제5근위소총병군단의 제2선견대인 제735돌격포연대는 1개 포병대대, 제7대전차대대, 제508자주포대대가 소속되어 있는 제45포병연대를 대동하고 테포씨 서쪽으로 진격했다. 선견대는 테포씨 마을에 진입하자마자 솔룬에서 탈출하던 일본군 차량화 병력들을 박살내고 일본군 유류 창고를 접수했다. 735돌격포연대는 솔룬에서 본대와 합류하고 철도를 따라 도망가는 일본군 병력들을 추격하며 섬멸했다. 제5근위소총병군단이 테포씨를 확보할 동안 제44전차여단과 제17소총병사단은 8월 13일에 솔룬 역을 장악했다. 제19소총병사단은 제61근위소총병연대와 508돌격포대대를 이끌고 솔룬 서쪽의 치니잉커우 역을 장악했다. 그곳은 하필이면 일본군 107사단 소속 병력들이 재집결하기로 되어 있던 장소였다. 그 무렵 제124소총병사단은 12일과 13일 동안 우챠커우를 지나 도시 외각의 일본군 요새 지대를 우회하면서 흐시커우 동쪽의 철로를 따라 진격했다. 그 도시의 일본군 제90연대와 제117연대는 동쪽과 서쪽에서 밀려오는 소련군의 대공새를 이틀 동안 받아내야 했다. 그리하여 일본군 제107사단은 8월 15일에 산맥 북서쪽에서 축출당하고 겨우 재집결한 후 소련군을 향해 반격을 가했지만 보잘것없는 성과만 나오고 말았다. 제5근위소총병군단이 솔룬을 점령해 일본군 107사단을 절단할 동안 야전군 선견대인 제61전차사단과 제113소총병군단은 울란 호 계곡 따라 진군하여 하일라얼, 쿠에일리우호를 지나 왕예먀오로 쇄도했다. 그런데 만주의 험한 지형 때문에 차량들의 연료소비가 예상보다 급증함에 따라 제39군 전체의 유류 보급 상황에 적신호가 걸렸다. 선견대에 비해 본대가 뒤쳐지기 시작하자 류드니코프 [[상급 장교|상장]]은 소속 모든 제대의 지휘관들과 참모들에게 최대한 연료 소비를 줄일 방법을 찾아보라 명령하고 전 군의 진격 속도를 10킬로미터 내외로 유지하라 명령했다. 8월 14일에 제44전차여단은 솔룬에서 북서쪽으로 6킬로미터 지점에서 가해진 일본군의 역습을 가볍게 막아냈으며 제5근위소총병군단의 다른 병력들은 솔룬 남쪽에서 들어오는 엇비슷한 규모의 일본군 공세를 역시 가볍게 격퇴했다. 제124소총병사단과 제19소총병사단이 박아 넣은 쐐기는 솔룬 서쪽으로 향하는 회랑을 열었고 그 회랑으로 제61전차사단과 제113소총병군단이 돌입하여 왕예마오 북서쪽의 일본군과 교전했다. 15일, 제39군의 선견 병력들은 왕예마오를 장악했다. 다음 이틀 동안 제5근위소총병군단과 제113소총병군단은 왕예마오에 입성했다. 솔룬과 왕예마오가 소련의 손에 떨어지자 관동군의 할룽-아르샨-우챠커우 요새 라인은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소련군은 일본군 107사단의 퇴각로를 차단하기 시작했고 107사단이 다른 일본군 제대와 만주 중심에서 합류하는 것을 틀어막았다. 산맥 북서쪽에서 소련 제124소총병사단이 일본군 107사단을 몰아낼 동안 후방에서 온 제221소총병사단이 요새지대 소탕에 성공하였다. 제39군이 일본군 107사단의 잔존병력 소탕을 끝낼 동안 I.I. 포포프 중장의 제94소총병군단은 2개의 축선을 통해 만주 중심으로 진격하다가 일본군 제10방면군 사령관인 호우린 대장의 항복을 받았다. 그날, 94소총병군단 소속 제358소총병사단은 할룽-아샨 요새지대 남쪽으로 진군해 8월 14일에 제124소총병사단, 제221소총병사단과 합류하여 일본군 소탕 작전을 지원했다. 모든 퇴각로가 다 끊겨버린 제107소총병사단은 일본의 항복에도 불구하고 계속 저항하다가 차례차례 소탕되었고 결국 8월 30일에야 일본군 패잔병들은 치치하얼 남서쪽의 차일라이에서 항복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